체육학

체육학 -공부론-

dream-tree89 2022. 9. 5.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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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용어 속에서 몸은 어떤 존재자의 본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몸체, 몸통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컴퓨터에 본체는 바로 컴퓨터 몸체와 동일한 의미이다. 몸체가 본체와 동일한 의미라면 그것은 존재자의 중심이라는 의미와 거의 동일하다. 몸체가 중심이라는 의미로써 사용된다면 그것은 마음과 동일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몸=마음=맘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김성태, 1995: 37).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체육 공부는 몸의 공부이기도 하다. 이런 창원에서 몸=마음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에 몸 공부와 마음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체육 공부 역시 마음의 공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체육 공부의 구성은 이론과 실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종착점이 '사람됨'이다. 사람됨은 다른 말로 인간 형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동양철학의 궁극적 도달 목적인 성인에 해당하기도 한다.

 체육 공부는 자신의 움직임의 과정 그 자체에서의 도의 깨달음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즉, 몸으로 배우는 것은 항상 실천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할 때 앎과 삶이 소통하는 사람됨의 공부로서 체육 공부는 제자리를 찾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공부론 일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용옥은 그의 저서에서 공부란 개념적 조작에 의한 지식의 체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길의 덕을 얻는 모든 학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989: 137). 몸은 기의 유기적 단위이며, 몸은 생명이다. 따라서 몸은 움직인다. 움직임이 없으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움직임이 없으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움직임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 그 길을 우리는 '도'라고 말한다.

 한편 동아시아 학문론은 우선 윤리적 주체와 지식을 분리하지 않는다. 주체는 지식 속에 내면화되며, 지식은 주체의 한 역동적 과정이다. 그래서 안과 밖, 몸과 마음이 통일적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천지 만물과 우주는 인간의 '몸-마음'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학문론에서 지식은 죽은 지식일 수 없으며, 윤리적 주체의 심신과 물론이려니와 천지 만물의 역동적 움직임과 살아있는 연관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체득 곧 몸으로 깨닫는 것이 중시된다. 몸을 깨닫는 것은 동시에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그저 지식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윤리적 주체를 통합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른바 공부의 활법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란 특별한 것이거나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살아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해나가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향상하고, 세상을 밝히며, 인간과 우주의 도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박희병, 1997: 6-7).

 현재 체육에서 이론과 실천의 분리는 체육의 위기의 한 단면을 잘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영민의 말은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앎의 소통, 이론과 실천의 이음새 없는 순환이 나름의 무늬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허위 의식이 사라지고 이른바 '평상심의 도'라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만남도, 사귐도, 시간도 없었고, 관념성과 논리에 위계로 환원된 건조하고 성마른 경합의 공간만이 있었을 뿐이다. 인식 주의에 빠져있는 우리는 늘 그러하듯이 논리의 일관성, 관념의 정합성, 이해의 확실성에만 연연한다면 당연히 오해란 답답하고 성가시며 심지어 불쾌한 경험일 것이다(김영민, 1998).

 또한 이진수의 체육 공부는 체육에서 몸 닦기에 해당한다. 몸을 닦는 행위는 수신이요, 마음을 닦는 것은 치심이다. 과거와 현재의 용어는 다르지만 오랜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언제나 생각하였기 때문에 몸 닦기는 그대로 마음을 닦는 것이었다. 수신이 바로 치심이었다(이진수.

 이러한 의미에서 체육 공부는 마음 닦기라는 말로 연결된다. 이러한 지적은 지금까지 체육에서는 몸 닦기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는 것으로 몸 닦기=신체 단련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신체 단련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기술의 습득에만 몰두하였다는 것인데 기의 습득은 도의 체득이라는 마음의 수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온전한 기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체육에서의 몸 닦기는 바로 체육 공부가 무엇인가를 답하는 것이다.

 최의창은 운동을 가르치는 방법을 기법과 심법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의 기법과 심법에 대하여 알아보자: 운동은 기능,  전술,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진선미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기능과 전술을 잘 활용하도록 지도하며, 후자의 경우 우리는 운동을 형이상학적 가치, 윤리적 의미, 미학적 아름다움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운동은 하나이되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며, 어떤 시각을 갖는가에 따라 우리는 운동을 전혀 다른 실체로 이해하고 대면하게 된다. 게임으로서의 운동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기능과 전술이나, 삶의 형식으로서의 운동에서는 그 운동 종목에 담겨 있는 그 운동만의 "전통, 정신, 안목"에 자신을 맡기고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운동을 가르칠 때 우리가 전달하는 내용은 기능, 전술, 규칙일 수도 있고, 전통, 정신, 안목일 수도 있다(최의창, 2002 : 258). 이처럼 기법과 심법은 장자의 공부론에 아이디어를 얻어서 운동 혹은 체육에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이다. 최의창의 구분처럼 지금까지 우리는 기능 중심의 학습에만 체육 공부의 모든 것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실기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가르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실기와 이론은 모두가 기능 중심의 학습에 지나지 않았다. 왜 우리는 그동안 최의창이 말하는 심법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가. 그것은 결과, 기록, 경쟁, 승리의 틀 안에서 학습이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공부의 궁극적 지향점은 사람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생존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일 반속에서 배우게 되는 마음공부 즉 덕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운동선수들에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인성교육이다. 승리, 기록, 결과, 경쟁에 대한 강박 관념으로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덕의 공부인 체육 공부가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됨이 형성되지 않는 학생 선수는 운동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승리보다는 사람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생 선수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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