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학

체육공부란 무엇인가?

dream-tree89 2022. 9. 5. 23:49
728x90
반응형

체육을 행하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운동행위 혹은 신체활동은 기술의 습득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도의 체득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기술의 습득은 신체 기법을 몸에 익힌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수영한다는 것은 수영의 여러 영법을 몸에 익혀 자기 기술로 체현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시행착오의 체험을 통해 자기화하는 작업이 체육에서 실기를 배우는 일이다.

 이에 관하여 존 듀이의 경험 개념에서 차용하여 해석한다면 시행착오식의 기술의 습득은 경험의 성장과 확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자기화하는 지성의 작용을 통한 기술의 습득은 경험의 성장과 연결된다. 이때 배운다는 것은 기술을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보다 더 낳은 체육 공부를 위한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기술에 대한 습득을 일종의 수행과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술을 삶의 행위로부터 따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술을 익히거나 기술을 쓰기 위해서는 내면의 성숙이라든가 마음을 재개하는 수행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장자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다. 장자에게 기술이란 삶과 떼어 놓을 수 없는 행위로서 인간 내면의 성숙을 도모하는 일종의 수행이다.

 또한 기술 연마를 통해 도를 겸해야 한다는 장자의 말은 수행을 통해 도를 얻는 것과 기술의 연마가 조금도 다름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기술을 익히거나 쓸 경우 옳고 그럼, 칭찬이나 비난, 다른 사람과의 경쟁심, 자기 자기 몸과 마음 등을 잊어야 제대로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술 쓰는 법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지 단지 손놀림이나 몸놀림으로 익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술의 터득과 발휘는 몸이나 손의 간단한 움직임이 아니라 자기 존재 전체를 불어넣는 마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천도편]의 명공도 수레바퀴를 알맞게 깎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직접 손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감응해야지 입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기술을 부리는 나의 천성과 재료에 부여된 천연의 품성이 합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체육의 목적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기술의 습득에 있는가 아니면 도의 체득에 있는가.

 우선 체육 공부의 대상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한다. 체육 공부는 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몸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몸은 정신과 육체를 구별할 수 없는 실체이다. 둘로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부에서 말하는 공부는 몸을 통한 기술의 습득이냐 아니면 몸 자체의 공부인 도의 체득이냐의 문제로 나누어질 수 있다. 결론을 말하면 저자는 체육 공부는 기술의 습득과 도의 체득의 합일이라고 본다.

 이처럼 기와 도의 합일을 지향하는 체육 공부는 사람됨의 공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체육의 구성은 이론과 실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사람됨'이다. 사람됨은 다른 말로 인간 형성이다. 인간 형성은 동양철학의 궁극적 도달 목적인 성인을 말하는데 자신의 움직임의 과정 그 자체에서의 도의 깨달음은 일상의 삶에 실천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즉 몸으로 배우는 것은 항상 실천의 문제로 남는다. 이러할 때 앎과 삶이 소통하는 사람됨의 공부로서 체육 공부는 제자리를 찾는 일이 될 수 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체육 공부를 기술의 습득과 도의 체득으로 구분한다면, 기술의 습득은 운동 기술을 배우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수영을 배운다고 한다면 수영의 영법들을 배우는 것 그것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다. 기술의 습득 자체가 수영을 잘하고 못하는 평가의 기본이 되지만 우리는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체육 공부라는 것이 기술의 습득을 의미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무엇은 바로 도를 의미하며 체육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도는 덕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도의 체득은 다름 아닌 덕의 체득이다.

 도와 덕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면, 천지가 순환하고 만물이 생성 변화해 가는 '길 자체'가 도라면 덕은 그렇나 길을 한 개체가 얻은 것, 곧 체득함이다. 도와 덕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장을 왕필주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는 생성하는 것이다. 덕은 쌓는 것이다. 사물은 형성된 것이다. 세는 이루는 것이다."란 구절에 대해 왕필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사물이 생성된 이후 길러지고 길러진 이후 형성되고 형성된 이후 이루어진다. 무엇 때문에 생성되는가? 도 이다. 무엇 때문에 길러지는가? 덕 이다. 무엇 때문에 형성되는가? 사물 이다. 무엇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만드는가? 세 이다."

 59장에 '덕을 거듭 쌓는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므로 덕은 결구 한 사물이 생성해 가는 길이 반복하여 자신에게 쌓이는가는 의미가 된다. 왕필의 명확한 풀이로 볼 때도 한 사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 길의 거듭 그 사물 자신에게 점점 쌓여가야 한다. 이것이 현덕인데 현덕에 관해 장자는 "태초에 무가 있었다. 있음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있지만 아직 형성되지는 않았다. 만물이 이 하나를 얻어 생성하는 것, 이것을 덕이라 한다. 또한 이것을 현덕이라 하고 큰 순응과 같다고 한다."고 설명하였다.

 덕을 체득한다는 것은 사람됨, 인간다움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사람다움, 운동선수다움, 아버지다움이 바로 도의 체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체육 공부의 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도의 목적은 사람됨, 인간완성, 인간 형성의 길을 말한다.

 또한 도를 체득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한다면 덕을 함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덕의 함양은 덕을 체득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체육을 통해서 체득될 수 있는 덕의 내용은 인의예지의 습득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의 체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노장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도는 곧 덕의 문제이다. 덕으로 돌아간다는 노자의 궁극적인 수양의 목표도 그 형평의 질서를 자신 속에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같은 맥락에서 자아의 완성도 자아가 늘 그런 형평의 상태에 있게끔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처럼 덕을 끌어안고 화를 길러 세상에 대해 순응하는 사람이 바로 최고의 인격체인 진인이기 때문이다(박원제, 1996 : 97-105)."

반응형

'체육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육의 참된 글쓰기  (0) 2022.09.11
체육학 -사람됨의 지향과 서사적 글쓰기-  (0) 2022.09.11
체육학 -공부론-  (0) 2022.09.05
체육공부와 반성적 글쓰기  (0) 2022.09.05
연구진실성의 디딤돌  (0) 202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