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발표된 <읽는 스포츠의 매혹: 서사적 글읽기를 통한 스포츠이해>를 읽은 후에 나의 생각을 이 글을 통하여 표현하려고 한다. 최의창의 <읽는 스포츠>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포츠에 관한 글을 읽고 싶어도 우리의 구미에 맞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아마도 알 것이다. 물론 최의창의 노력에 의하여 여러권의 번역 서적들을 읽을 수 있지만 우리의 운동선수들 자신의 운동 체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책들은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운동선수에게 글쓰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읽기보다는 쓰기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읽기는 쓰기 이후의 이차적인 문제이다. 물론 쓰기가 먼저냐, 읽기가 먼저냐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풀리지 않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쓰기가 읽기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쓰기 스포츠가 제대로 된다면 읽는 스포츠의 즐거움은 그다음 차원에서 다양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들이 운동 체험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그들의 수준 높은 스포츠 체험의 깊이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들의 체험의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과 같은 수준의 스포츠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운동선수 혹은 스포츠참여자의 글쓰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읽기 스포츠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의 체험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장 시급한 일은 읽는 스포츠 이전에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글쓰기가 쉽지 않은 운동선수들에게 이것은 어려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사항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의 학교 교육의 문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최의창이 소개한 글 속에서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책은 미국의 얘기들 뿐이다. 물론 예외적인 사항으로 양선규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지만 그는 글 쓰는 일을 주업으로 한 소설가이지 운동선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현실에서는 서사적 글쓰기를 제대로 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특히 최의창이 말하는 서사적 스포츠는 아직은 미국에 국한된 것이고 우리에게 먼 나라 얘기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현실의 원인을 학생들의 공부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 학생들은 오려내고 오려 붙이기 식의 리포트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얘기를 논리적으로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이해한 거와 자기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그것이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글쓰기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운동선수에게 있어 글쓰기는 쉽지 않다. 정규 수업 시간 뿐만 아니라 각종 시합과 시합 준비를 위한 수업결손은 운동선수들에게 공부할 시간을 빼앗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한 학기의 학생들의 제출한 수백편의 리포트를 읽다 보면,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이 쓴 글인 것처럼 적고 있다. 자신은 어디에 두고 남의 얘기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훈련된 학생들에게 정상적인 글쓰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운동선수 혹은 체육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선으로 체육의 참된 글쓰기의 조건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으로 체육의 참된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체육의 참된 글쓰기 조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체계적인 글쓰기의 훈련도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힘든 일이다. 그것도 자기 생각을 말과 글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려운 과정에서 나마 많은 글이 발표되고 있다. 이런 글들에 대한 문제점은 여전히 유훃다.
여기서 문제점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글들 가운데에는 자의식이 없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논의에 대한 빛깔을 잃고 있는 국적, 정체불명의 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글들은 고민의 흔적과 치열한 노력의 과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단지 글을 위한 글에 불과하고, 다만 편집의 세련미를 찾아볼 수 있을 분이다.
여하튼 우리는 우리의 말과 글을 가지고 우리의 생각을 표현해야 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체육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맺어진 상태에서 비롯된다. 현실적 경험을 통해 잉태한 생명체는 소중한 우리의 지적 자산이 된다. 그렇지 않고 국적 불명과 우리 현실을 벗어나 이루어진 결과물에 대하여 우리는 좋은 시선을 보낼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현실에 대하여 외면하고 먼 나라의 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현학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과 그 결과를 통해 사회변혁을 시도하여 보다 좋은 삶을 이루려고 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성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서구화됨으로써 모든 한국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체성은 없다. 이런 사고는 주입식 암기 위주 교육방식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외국 사회과학이론을 목표로 삼고 우리 사회 현상을 수단으로 삼을 경우, 이런 것과 실제의 괴리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숙제로 남기 쉽다. 그러한 비현실적 사회과학은 우리 국민에게 실망만을 안겨주는 학문이 되기 쉽다(이성용, 1999 : 263).
이처럼 우리 체육 혹은 한국체육의 이론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체육에서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을 모아서 나름대로 의견을 다룬다.
첫째, 글쓰기는 머리와 기교가 아니라 마음속의 심안과 느낌의 감동으로 써야 한다고 말하면 무슨 괴변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논리와 형식에 고려하여 글을 써야 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머리와 기교의 논문 쓰기는 형식에 고정되어 내용과 뜻을 죽일 수 있음을 경계하여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다. 논문은 뜻의 전달에 있지 형식에 치우쳐 보기 좋은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체육, 스포츠에 사랑과 열정이 없이 쓰이는 글은 죽은 글이다. 글 속에 고민의 흔적이 베여있어야 한다. 자의식 없는 글자의 나열은 생명력이 소실된 무표정한 허수아비의 모습을 한 글자로 남을 뿐이다. 이러한 글은 논문을 위한 논문, 평가, 업적을 위한 글일 뿐이다. 또한 읽히지 않는 글은 글의 생명력이 손실된 미아이다. 우리는 홀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치열한 자기 투쟁의 과정에서 산모가 아기를 분만할 때의 산모의 고통에는 버금가지 못하지만 고통 속에서 글에 생명을 부여한다. 만약 그러한 글이 읽히지 않는다면, 그 글은 생명을 잃고 성장하지 못하고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 글이 읽히고 그것을 토대로 논의와 비판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한 생명체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글들은 다시 현실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홀로 존재한다면 글은 현실 인식이 결여된 이유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배제당하고 만다.
셋째, 더는 자기를 죽이지 말자.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 심지어 자신을 죽이고 심지어 학대한다. 우리가 생산하는 글 속에는 서양학자들의 이름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과연 그들의 목소리에 우리는 순종하고 그들을 학문적 아비로 불러야 하는가, 엄연히 우리는 이 땅에 아비와 어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모순을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더는 자기를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자. 자신의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이 경험하고 고민한 결과와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술자리가 아니라 글을 통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학문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 긴 시간 동안 힘없이, 아무 저항 없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또다시 학문적 식민지의 노예로 만들지 말아야 하낟. 그들이 살아야 할 곳은 자유와 해방된 공간에서 우리의 아비와 어미의 자양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이다. 그래야 한국적 체육 이론이란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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