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글쓰기는 고전과 현대, 전통과 미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사유의 역사와 철학사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며, 동시에 변화해 가는 현실과 다가오는 미래를 응시하는 것이다. 철학사와의 대화가 없는 사유(비사유)는 문명비판, 평론, 수필 등은 될지 몰라도 철학은 아니다. 반면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현실에의 응시가 없는 사유는 죽은 언어를 나열하는 훈고학이다. 사유는 문화 평론도 푼 고학도 아니다. 참된 사유는 철학사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응시할 때 성립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사유의 글쓰기이다. (이정우, 1997: 185-186).
이정우의 말처럼 우리는 서양 양아비를 섬겨야 하는가. 우리가 하고 있는 학이란 선진학문을 접한 이들의 수입된 수입품이다. 그것들을 진리로 여기고 우리는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것을 우리 현실에 적응시키려고 분투한다. 외국인의 멋있는 신발은 그들의 발에 맞는 신이지 우리에게는 신을 수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학이란 그 시대가 상황과 맥락에서 크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한 씨를 우리 땅에 뿌린다고 같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토양과 기후가 맞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 성장을 바라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성장을 바라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우리는 더 이상 현실에서 벗어난 죽은 언어를 나열하는 훈고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위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맹목적이고 현학적인 글쓰기의 태도이다. 그것은 죽은 언어이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버려진 것에 불과하다.
우리 주위의 논문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사대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글쓴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은 영어로 된 글들이 태반이다. 우리가 50년 이상 이 땅에서 체육이란 것에 고민하고 생산해 놓은 글들이 많은 데 우리는 스스로 그러나 글들을 텍스트로 삼지 않는다. 그 글들은 우리의 현실을 통하여 잉태해 낸 결과물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홀대한다. 그리고 외제만을 선호한다. 외제가 우리 몸에 맞지 않아도 외제상표를 과시하고 현학적이 되고 싶어서 상표를 항상 우리 몸에 감싸고 생활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국인이 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몸에 맞는 옷을 입히자. 그래야 멋이 나고 기품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글쓰기에 대하여 알아보자.
참된 글쓰기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저항한다. 미국문화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은 미국분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교제, 구사하는 어휘, 나아가 사고방식 자체까지도 철저히 미국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어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참된 글쓰기란 이러한 영어 지상주의, 미국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화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서 학문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이정우, 1997: 183).
이러한 참된 글쓰기를 위해서는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글쓰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의식 있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자기도 모르는 글을 나열하거나 현학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를 생각하고 읽기 쉽게 글쓰기를 하여야 한다. 글은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문제의식과 고민과 그리고 체육의 사랑과 열정 속에서 글쓰기는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수정과 첨삭의 퇴고 과정을 거쳐 글의 생명을 얻고 세상에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거짓도 허위 의식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의 양심을 기준으로 삼아 표절과 남을 현혹하는 글쓰기 철학은 버려야 할 것이다.
현재 체육에 관련된 601권의 도서가 발행되어 유통되고 있다. 이 중에서 연구 서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이 개론서들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개론서의 내용이 상호 간 비슷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문제는 같은 내용의 서적도 볼 수 있다. 많은 책이 발행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이 아닌 것을 자신의 지식인 양 표절하여 짜깁기로 엮어 놓은 책들이 유통되는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또한 교수 평가제로 인한 업적 쌓기를 위한 책 만들기가 횡행하고 있다. 책은 학문적 열정에서 생산되어야지 업적과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의 글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서 책을 생산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나열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일찍 죽을 것 같지도 않은데 무엇이 바빠서 저술에 급급해하는가? 욕심 이전에 책을 쓰지 말아라. 꾸준히 논문을 써 가되, 너의 학설을 결론짓지 마라, 지금 너의 학문이 대상으로 한 양 저술을 하면 이 담에 늙어서 후회하게 된다. 그때 가서 너의 지난날의 저술을 수거하거나 고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너의 글이 결국은 남을 속이고 남에게 미혹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니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는가? (김충렬, 1994 : 4)
사람됨의 지향과 서사적 글쓰기
문장이 정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문제는 그 문장을 생성한 인격의 가치를 시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언어가 정확하다는 것은 삶의 중요한 목표이다. 언어가 정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유효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른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격 연마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문장에 대한 훈련은 인간성 교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 전쟁에 비유해 볼 수도는 있을 것이다. 전쟁에 과학적인 장비와 원활한 병참 체계를 갖추어야 하듯이 정확한 지식과 많은 훈련이 필요하듯이 글짓기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표현되어야 한다. 나폴레옹은 총으로 싸우지 않고 병사들의 발로 싸워싿고 말했지만, 글쓰기에도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몸소 겪는 체험이 중요하다. 한 지점에 화력을 집중해야 하듯이 핵심을 향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집중할 수 있어야 하며, 분산 고립된 적을 공격한 후에 집결된 적을 공격하듯이 용이한 내용을 먼저 논술하고 심오한 내용을 논파해야 한다.
글짓기는 관련 문헌의 숙지도가 필요하다. 읽지도 않고 말할 수 없다. 같은 문제도 누군가 발표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글짓기를 하기 전에 관련 논문이나 서적을 철저히 읽는 것이 참된 글쓰기의 지름길이다.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를 하지 않고는 글쓰기를 잘하려고 생각하는 자체도 무리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읽고 말하고 써야 한다. 이것이 참된 글쓰기의 핵심이다. 더불어 선배와 동학들에 대한 글을 쓰는 예의이기도 하다. 또한 글쓰기를 잘하려면 현장 체험이 필요하다. 운동을 잘하려면 몸의 훈련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그만큼의 글쓰기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신을 죽이는 일보다는 자기를 살리는 글이 필요하다. 이것은 체육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서 비롯되는 자의식이 투철한 글쓰기이다. 더 이상 자의식이 상실된 글쓰기는 지속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생아를 낳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풍부한 인문학적 토양을 쌓아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참된 글쓰기는 한 번에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개작 작업을 통하여 하나의 의미치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글쓰기 작업은 다시 쓰는 작업(다시 생각하고, 다시 고찰하고, 과정을 다시 인식하는 과정)이라는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르트로는 글을 쓰고, 다시 쓰는 것이 어떻게 깊이 있는 글쓰기를 지향하게 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속해서 고쳐 나가고, 의미를 중층적으로 쌓아 나감으로써 본질적인 의미의 모호성은 유지한 채 어떤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깊이 있는 글쓰기는 일사천리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고(개정하고, 편집하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다시 쓰는 과정은 오히려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적인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 예술품은 작가의 개인적인 서명이 들어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작품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느 방향에서든지, 전체와 부분의 조화를 살피면서 계속 접근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글쓰기는 반성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반성적 차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참된 글쓰기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인문학의 글쓰기(서사적 글쓰기)는 주관적인 글쓰기이며 이는 철저한 반성적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는 철학사에서 일관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플라톤, 데카르트, 하이데거, 니체의 글들은 주관적인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반성적 고찰을 통해 자신을 연구의 주체로 선택하여 반성하고 그 가운데 얻는 결과로 글을 쓴 것이다. 체육에서도 역시 개인의 스포츠 참여를 통하여 얻게 되는 스포츠 체험의 세계를 바탕으로 반성적 행위에서 글쓰기는 시작되고 그 가운데 참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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